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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투데이] [공연리뷰] “파도에 묻힌 목소리를 불러오다”…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작 <심청>
  • 2025-08-15 08:40
  • 조회 33

본문 내용

막이 오르기 전부터 극장은 이미 바다의 기운에 잠겨 있었다. 객석 사방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마치 관객을 파도 속으로 밀어 넣었다가 다시 끌어내는 듯했다. 객석에 입장하자, 프로시니엄 무대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흑백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차들이 오가는 도심, 공연 연습실, 그리고 안과 광고판. 일상의 풍경 속에서 사람들에게 묻는다. “심청은 누구인가.”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담겼고, 일부 응답은 배경에 깔린 바닷소리에 묻혀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질문은 분명 던져졌지만, 어떤 목소리는 도달하지 못하고, 어떤 말은 애초에 전달될 수 없다. 


영상이 끝나자, 무대 뒤편에서 수십 명의 어린 소녀들이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마치 놀이터를 점령한 듯 해맑게 소리를 지르며 객석을 스치고 지나간 아이들의 눈은 검은 분장으로 칠해져 있었다. 천진난만한 웃음과 달리,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존재로 설정된 것이다. ‘시각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보지 않을 권리’가 있는 존재들에 대한 표현으로 다가왔다.


전주세계소리축제와 국립창극단이 공동제작한 판소리 씨어터 <심청>은 요나 김 연출이 전통 판소리 심청가와 설화를 바탕으로 삼되, ‘효녀 심청’이라는 미화된 도덕극을 완전히 걷어내고, 폭력과 권력, 외면과 무기력의 민낯을 드러낸 작품이다. 무대 위의 심청은 더 이상 숭고한 희생을 감내하는 성녀가 아니다. 그는 착취의 구조 안에서 끝없이 몰리는 폭력에 맞서야 하는, 살아남는 자다. 이 작품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까지, 관객은 전통의 ‘심청전’을 기대할 틈 없이 무대 위의 차갑고 생생한 현실과 마주한다.


무대 초반, 심청(김우정)은 뿔테 안경을 쓰고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는다. 뺑덕이 장승상댁 부인과의 은밀한 거래를 성사시키면서, 심청은 ‘세 아들의 노리개’로 넘겨진다. 장승상댁 세 아들은 의도가 분명한 시선과 손짓으로 심청의 주위를 맴돌다가, 빠르게 심청의 안경을 벗겨낸다. 심청의 시야, 주체성,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권리까지 무참히 빼앗겼음을 상징한다. 이후 심청은 안경을 고쳐 쓰려는 시도를 몇 차례 이어갔지만 결국 좌절하고, 안경이 사라진 자리엔 권력을 쥔 자들이 만들어놓은 왜곡된 세계만이 남는다.


제3장 ‘팔려가는 심청’은 이 작품이 지향하는 불편함과 잔혹함의 감각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인당수 제수로 가기 전날, 심청은 아비의 앞길을 가로막고 드러누운 채 절규한다. “아이고 아버지, 공양미 삼백석을 누가 저를 주오리까. 남경장사 선인들께 제 몸을 팔어. 오늘이 인당수 제수로 가는 날이니 저를 망종 보옵소서!” 목소리에는 절망과 공포, 체념이 동시에 실려 있고, 그 떨림이 객석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눈먼 심봉사(유태평양)는 그 절규를 듣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들었음에도 뺑덕(이소연)의 손을 잡고 모른 척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원전 속 부녀의 애틋함은 사라지고, ‘보지 못함’을 넘어 ‘귀 기울이지 않는’ 외면이 차갑게 자리 잡는다. 


원작에서 장승상댁 부인은 심청의 처지를 굽어살피며 따뜻한 친절을 베푸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 김금미가 연기한 장승상댁 부인의 속내는 냉혹한 권력자의 계산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심청에게 “수양딸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한다. 표면적으로는 따뜻한 배려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집안의 노리개로 삼으려는 의도다. 끝내 심청이 “이미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라며 선인들과의 계약을 깨지 않겠다고 하자, 부인은 마지막 기념하겠다며 아들들을 시켜 심청을 힘으로 제압하고 사진을 찍는다. 이 장면에서 무대 중앙의 조명이 심청을 향해 좁혀지고, 배경에는 차가운 정적이 흐른다. 장승상댁 세 아들이 심청을 둘러싸고 웃으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 원작 속 애틋한 이별의 징표는 불법 촬영과 보복을 연상시키는 폭력 장면으로 변모한다. 관객석에 앉아 있던 나조차도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불쾌함이 스며들었다. 이 불쾌함은 분명 연출의 의도지만, 그 가학성의 강도는 숨쉴 틈을 앗아갈 정도다.


심청이 바다에 던져진 뒤, 무대 곳곳에 ‘LOVE’, ‘VICTIM’, ‘SHE GOT LOVE’라는 글씨가 남는다. 이는 장승상댁 세 아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로 포장하려는 자기미화지만, 일부 관객에게는 불필요한 포장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이미 불행 서사가 빼곡한 전개 속에서 이러한 장치는 메시지를 강화하기보다는 감각적 과잉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심청이 제물로 바다에 던져지기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장승상댁에서 노리개로 살아가는 것보다 죽음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장소가 인당수에서 배로 옮겨졌을 뿐, 그 위에서도 심청은 선장과 선원들에게 은유적인 성적 학대와 괴롭힘을 당한다. 직접적인 폭력은 아니지만, 배우들의 시선과 손짓, 뜯겨진 옷과 피투성이가 된 몸, 불길하게 울리는 북소리 등을 통해 그 위협은 관객의 피부에 와 닿았다. 원전에서는 효심으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숭고한 희생이 신의 감복을 불러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그 선택이 얼마나 절망적인 현실의 산물인지를 잔혹하게 드러낸다.


제8장에서 심봉사는 집 안의 라디오를 통해 심청의 자백이 담긴 노래를 듣는다. 심청이 장승상댁에 수양딸로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과 맞바꿔 팔려갔다는 사실이 흘러나온다. 배우의 목소리는 절절하면서도 단호하다. 어쩌면 심봉사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제9장에서 그가 마침내 눈을 뜨는 순간, 빛 속에서 보이는 것은 기적이나 축복이 아니라, 아수라장이 된 현실이다. 그는 허상 속 심청을 붙들고 오열하지만, 무대 한쪽에서 진짜 심청은 상처투성이 얼굴과 찢어진 옷차림으로 등장해 밧줄에 묶이지 않은 발로 유유히 무대를 빠져나간다. 


극의 시간적 배경을 오늘날로 옮겼음에도 판소리 ‘심청가’를 변형 없이 무대에 올린 선택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창극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무대 장치와 해석을 덧입힌 이 균형은 단순한 파격을 넘어선다. 특히 출연진 전원의 소리는 극의 몰입도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김우정, 유태평양, 이소연, 김미진, 김금미 등 주요 배역은 물론 조역에 이르기까지, 완성도 높은 발성과 탄탄한 성음이 극의 서사와 감정을 견인하며 장면마다 울림을 남겼다. 


심청은 편안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효녀상을 해체하며 권력과 폭력의 구조를 날카롭게 드러낸 이번 시도는 동시대 창극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연출이 만들어낸 불편함은 때로 과잉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바로 그 불편함이 관객을 전통 서사의 안전지대 밖으로 밀어내고 효의 이름 아래 가려졌던 질문과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그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세계의 민낯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편, 2025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으로 첫선을 보인 <심청>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9월 3일부터 6일까지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진보연 기자


[기사원문보기]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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